한국에서는 점점 더 찾아보기 힘든 ‘시골 외갓집’ 정서를 일본 영화 속 일본 집들의 곳곳에서는 느낄 때가 있습니다. 일본의 집이 갖는 고유한 정서를 느껴볼 수 있는 영화 속 장면과 함께 일본 집 관련 용어들을 담아봅니다.
<내용 구성>
◆ 영화 <조제,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>, 다이도코로(台所)
영화 <바닷마을 다이어리>, 엔가와(縁側)
>>추천 영화: 고레에다 히로카즈(是枝裕和) 감독의 <바닷마을 다이어리(원제: 海街diary)>(2015)
도쿄 근교의 바닷마을, 가마쿠라(鎌倉)에 대한 동경을 심어준 <바닷마을 다이어리>는 원작 만화도 번역되어 인기를 끌었죠. 이 영화 속에는 사계절과 예쁜 네 자매의 이야기가 오래된 일본 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데요. 막내 역의 배우 히로스에 스즈가 자전거를 타고 벚꽃 터널을 지나는 봄 장면도 인상적이지만, 이 영화의 백미는 네 자매가 마당을 접하는 좁다란 마루, 엔가와(縁側)에서 보내는 여름 장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.
엔가와(縁側)
엔가와(縁側)란, 일본식 집의 거실 끝부분을 마루식으로 확장해 만든 ‘통로’입니다. 정원에서 직접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‘출입’ 기능도 갖고 있습니다.
엔가와와 거실을 구분해주는 것은 하얀 창호지가 발린 미닫이문인 ‘障子(しょうじ;장지)’입니다. 집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, 애매한 공간으로 일본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.
<바닷마을 다이어리>의 자매들은 어쩐지 거실이나 방 안에 있는 모습보다, 이 엔가와에 앉아서 정원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더 많은 듯한데요. 유타카를 차려 입고 조촐하게 불꽃놀이를 하는 장면도 유명하죠.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‘하나비(花火)’라고 한다면, 자매들이 정원에서 즐기던 향 모양의 불꽃놀이는 ‘센코하나비(線香花火)’라고 합니다. ‘센코(線香)’는 ‘향’이라는 뜻으로 엔가와에 피워놓은 모기향, ‘카토리센코(蚊取り線香)’도 일본 사람들에게는 ‘여름’의 상징이죠.
또 하나, 이 엔가와에서 즐기는 무기챠(麦茶; 보리차), 스이카(スイカ; 수박)도 그렇게 시원하고 맛있다고 하네요. 엔가와에서 보내는 여름의 낭만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, 또 다른 모리 준이치 감독의 영화 <리틀 포레스트: 여름과 가을(リトル・フォレスト 夏・秋)>(2014)도 추천드립니다. 여름에는 엔가와가 모든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드는 마법 같은 식사 공간으로 변신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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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화 <조제,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>, 다이도코로(台所)
>>추천 영화: 이누도 잇신(犬童一心)감독의 <조제, 호랑이, 그리고 물고기들(원제: ジョゼと虎と魚たち)>(2003)
<심야식당>, <고독한 미식가>가 한국에 알려지기 전, 일본의 부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었으니, 바로 영화 <조제,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>의 부엌이었습니다.
어느덧 20년 전의 영화가 되어가고 있는 이 영화는 당시 스물네 살의 츠마부키 사토시(‘츠네오’ 역), 스물 세 살의 이케와키 치즈루(‘조제(쿠미코)’ 역)라는 청춘 스타를 탄생시키며 ‘감성파’ 영화 팬들을 자극했던 영화입니다. 근사한 제목은 원작이 된 다나베 세이코(田辺聖子)의 단편소설에서 가져왔습니다. (다나베 세이코의 책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모아 많이 번역되기도 했습니다.)
이 영화의 명장면은 바로 조제가 만들어주는 맛있는 가정식 요리입니다. 미소시루, 야키자카나(焼き魚;구운 생선), 다시마키다마고(だし巻き玉子; 계란말이)에 ‘스이항키(炊飯器; 전기밥솥)’에서 갓 푼 김이 모락모락나는 시로고항(白ご飯; 흰밥). 일본식 집밥의 전형을 보여주는 조제의 요리는 화면을 뚫고 들어가 한 그릇 먹고 싶어지는 소박하지만 강력한 요리였습니다.
다이도코로(台所)와 키친(キッチン)
일본에도 ‘부엌’을 가리킬 때 ‘키친(キッチン)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, 조제가 요리하는 공간은 왠지 ‘다이도코로(台所)’라고 불러줘야만 할 것 같습니다. 다이도코로는 헤이안시대에 식사 공간에 대해 붙인 명칭에서 유래했고, 키친은 그야말로 영어에서 비롯된 것이니, 두 단어는 의미는 같지만 정서가 조금 다르겠죠?
요시모토 바나나가 유명한 데뷔 소설 제목을 ‘다이도코로’가 아닌 ‘키친’이라고 한 것은 당시의 신종 직업인 푸드코디네이터를 꿈꾸는 여주인공의 직업, 트렌디한 분위기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, 독자의 질문에 작가 본인이 답한 적이 있습니다. 다이도코로의 ‘나가시다이(流し台; 싱크대)’에 서 있는 이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, 왠지 모를 아련한 느낌이 듭니다.
>> 2020년 12월 개봉하는 <조제,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> 애니메이션 영화의 공식 사이트 https://joseetora.jp/#index
영화 <인생 후르츠>, 이마(居間)
>>추천 영화: 후시하라 켄시(伏原 健之)감독의 <인생 후르츠(원제:人生フルーツ)>(2016)
일본의 명배우 키키 키린(樹木希林)이 내레이션을 맡은 것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다큐멘터리 영화 <인생 후르츠>. 한국에서도 개봉 후 좋은 평을 받으며 조용히 관객들을 모았던 영화인데요. 일본의 90세 건축가와 87세 아내의 노년의 나날들과 40년 넘게 살고 있는 집과 정원이 아름답게 그려진 작품입니다.
‘ときをためる暮らし(토키오타메루쿠라시)’, 즉 ‘시간을 들이는 찬찬한 삶’을 추구하는 건축가가 자신의 철학을 실험하기 위해 지은 집인 만큼, 공간과 풍경에 더욱 관심이 가는데요. 두 부부가 마주하고 식사를 하는, 영화 속 주요 공간이 바로 ‘이마(居間)’입니다.
이마(居間)와 챠노마(茶の間)
이마(居間)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이 놓인, 식사 공간과 가족들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거실을 겸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.
<인생 후르츠>에도 잠깐 등장하는 주인공 부부의 집의 ‘마도리즈(間取り図、まどりず; 방의 배치, 종류, 크기 등을 평면도로 표시한 것)’를 보면 ‘이마(居間)’로 표시되어 있고, 테이블과 가구들이 등 흔히 말하는 ‘서양식’에 가깝습니다.
같은 용도의 공간을 전통적인 일본 집에서는 ‘챠노마(茶の間; ちゃのま)’라고 불렀고, 다타미(畳)가 깔린 경우도 많았습니다. ‘차(茶)’라는 글자가 들어가 혹시 ‘다실’인가?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‘이마’와 마찬가지로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내는 거실에 해당하는 공간입니다. 티비가 보급된 이후에는 티비를 보는 공간이 되어 일본에서는 ‘시청자 여러분’이라는 뜻으로 ‘お茶の間の皆さん(오챠노마노미나상; 챠노마의 여러분)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네요. ‘챠부다이(ちゃぶ台)’라고 하는 낮은 원형 탁자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식사나 술을 즐기고, 겨울에는 고다츠를 놓고 귤을 까먹는 풍경. 그곳이 ‘이마’, ‘챠노마’입니다.
일본의 가족과 집안 풍경의 ‘원형’이라고 할 만한 풍경을 담아낸 오즈 야스지로(小津安二郎) 감독의 영화 <동경 이야기(東京物語)>(1953)에도 챠노마 풍경이 잘 담겨 있어 추천합니다. 이 영화는 영화 감독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습니다. 영국영화협회(BFI)가 1952년부터 10년에 한 번씩 잡지 <Sight&Sound>를 통해 발표하는 "영화 감독이 뽑은 베스트 영화", "비평가가 뽑은 베스트 영화"의 2012년 조사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<동경 이야기>가 각각 1위, 3위를 차지했습니다(*).
* 2012년 8월 2일 <시네마투데이> 기사 참고 https://www.cinematoday.jp/news/N0044641
영화 <일일시호일>, 도코노마(床の間)
>>추천 영화: 오모리 타츠시(大森 立嗣)감독의 <일일시호일(원제: 日日是好日)>(2018)
다이도코로/키친. 챠노마/이마. 같은 공간을 부르는 명칭이 다른 것, 그 두 표현이 동시대에 같이 쓰이고 있는 것은 전통적 일본 주거(和室)와 서양식 주거(洋室)가 공존하는 일본 주거문화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. <인생 후르츠>의 부부들이 90세라고 해서 전통 일본 주거를 살고 있지 않은 것만 해도 알 수 있죠. 반대로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‘고민가(古民家;일본어 발음은 ‘코민카’)’에 대한 애정이 다시 싹트고 있어 전통적인 주거를 더 ‘힙하게’ 느끼고 있는 요즘입니다.
그런가하면 <인생 후르츠>의 내레이션을 맡은 키키 키린이 다도 명인을 연기해 일본 다도 입문 영화로 많이 소개되고 있는 영화 <일일시호일>의 공간은, 그야말로 전통적인 일본 집의 공간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. 이 영화에서 제대로 볼 수 있는 일본 집의 독특한 공간이 있으니 바로 ‘도코노마(床の間)’입니다.
도코노마(床の間)
도코노마(床の間、とこのま)는 일본의 전통적인 다다미 방에서 방바닥을 한 단 높여 벽에 족자(掛け軸; 카케지쿠)를 걸고 꽃꽂이 한 꽃(花活け・花生け; 하나이케. 꽃을 꽂은 용기는 ‘하나이레(花入れ)’)을 놓을 수 있도록 만든 공간입니다. 정식 명칭은 ‘도코(床、とこ)’입니다. 잘 모르고 들으면 죽은 가족의 영정 사진 등을 모셔놓는 ‘불단(仏壇)’과 헷갈릴 수도 있지만, 도코노마는 어디까지나 계절별로 꽃이나 그림을 장식해놓는 ‘장식공간’입니다. 영화 <일일시호일>에서 주인공이 스승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코노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카케지쿠에 적힌 선적인 글(禅語), 달마도(達磨画) 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모습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. 면벽 수행으로 유명한 달마대사는 일본에서 ‘칠전팔기’를 뜻해 카케지쿠 그림으로도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.
영화 제목이 <日日是好日(니치니치고레코지츠; 매일매일이 좋은 날)>의 뜻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, 알고 계셨나요? ‘매일매일이 좋은 날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’는 뜻, ‘흘러가는 하루하루에 좋음과 나쁨으로 구분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’는 뜻. 여러 분에게는 어떤 뜻으로 다가오시나요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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